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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월사 혜거국사부도
    망월사 혜거국사부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2호(1985.6.28) 호원동 산 91번지 망월사 부근

    망월사 큰 법당에서 남서쪽으로 언덕을 넘어가면 혜거국사 부도가 있다.
    부도란 이름난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해 두는 돌탑을 말하는데, 대개 절 근처에 세운다.

    혜거국사의 사리를 봉안한 이 부도는 팔각원당형이다.
    전체의 높이는 3.4m이고 탑의 몸통 둘레는 3.1m이다. 탑모양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기단부위에 구형 탑신을 안치하고 옥개석과 상륜부로 구성돼 있다. 기단부는 지대석과 대석으로 구성돼 있는데 지대석은 팔각형 삼단의 일석으로 조성되고 높이가 80cm이다. 그리고 그 위에 괴임대를 놓았다.
    탑 몸통은 공 모양으로 조성되고, 괴임대 위쪽과 옥개석 아래쪽에 홈을 파서 탑 전체의 안정감을 꾀했다. 옥개석은 복발과 보주까지 한 개의 돌로 만들었는데, 낙수면은 목조건물의 지붕모양을 나타내고 있으며, 귀꽃은 모두 8개이다.상륜부는 옥개석과 일석이며 복발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것이 특징이다.

    부도의 주인공인 혜거국사는 속성이 노씨이며, 자가 홍소로서 고려시대 국사를 지냈다. 그러나 행장은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 약수선원 목조보살입상
    약수선원 목조보살입상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6호(2001.9.17) 호원동 226-54

    이 보살상은 조선초기 보살양식(菩薩樣式)을 일부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중기의 보살상이다. 보관(寶冠)을 벗 긴 상의 전체 크기는 84㎝로 아담하며, 조각도(彫刻刀)를 쓰기에 좋고 자체 독성(毒性)이 있어 해충에 강한 행자목(杏子木)으로 제작되었다.

    상(像)의 형태는 작은 이목구비를 한 통통한 얼굴과 원형 귀걸이·높게 결발(結髮)하고 귀 뒤로 돌아가 어깨까지 내려온 모습이다. 이같은 결발형식(結髮形式) 및 귀걸이 표현은 고려말부터 유행하여 조선초기에는 간략화되었던 표현수법이다. 어깨는 얼굴에 비해 좁고 쳐져서 다소 왜소한 느낌이며, 팔찌를 장식한 오른 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다. 어깨에 드리워진 천의(天衣)는 팔을 휘감고 발 아래까지 흘러내렸고, 가슴 밑에는 군의(裙衣)를 묶은 띠매듭이 있으며, 양 다리 사이에 수대(繡帶)가 내려져 있다.

    이 작품은 15세기 작으로 비정(比定)된 안성청룡사(安城靑龍寺) 관음보살좌상(觀音菩薩坐像)이나 파계사(把溪寺) 원통전 관음상(圓通殿 觀音像)보다 결장형식(結髮形式)이나 귀걸이가 간략화 되었고, 신체비례도 5등신 이어서 1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약수선원 목조보살입상은 15세기의 특징이 남아있는 결발형태나 통통한 얼굴 등에서 조선 중기, 즉 16세기의 작품으로서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더욱이 좌협시(左脇侍)인 동국대(東國大) 소장(所藏) 목조관음보살입상(木造觀音菩薩立像)의 복장기(腹藏記)가 발견됨에 따라 명확한 제작연대와 봉안사찰(奉安寺刹)·조각장인(彫刻匠人) 및 발원자(發願者) 등을 알 수 있는 상(像)이어서 조선중기의 보살상(菩薩像) 및 조각장(彫刻匠) 유파(流派)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작품이다.

    ※ 이 상(像)을 조사하신 교수에 의하면 이와 똑같은 모습의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이 동국대에 소장되어 있고 복장기(腹藏記)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본래의 사찰(寺刹)이 폐사(廢寺)되면서 삼존불(三尊佛)이 흩어졌고, 현재 주존(主尊)은 소재불명(所在不明)이다.

  • 하석 박정 영정
    하석 박정 영정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7호(2001.9.17) 장암동 197번지

    조선 중기의 문신인 하석(霞石) 박정(朴 炡 : 1596(선조29)∼1632(인조10))의 초상화이다.
    박정의 푸른색 관복상(가로 153㎝, 세로 82㎝)이 작품은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으로 낮은 사모에 백한(白閑)이 그려진 흉배의 푸른색 관복을 입은 인물을 묘사하였다. 인물의 묘사법을 보면 조선중기 초상화의 기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흉배의 양식은 1623년 박정이 인조반정의 참여로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록될 당시의 정3품 품계에 해당되는 백한(白閑)이 그려져 있어 공신책록과 연관하여 그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화면의 하단부에는 잘려나간 듯 하지만 점묘법을 연상하게 하는 필치로 채전(彩氈)이 그려져 있어 조선중기의 초상화의 형식을 반영한다. 이 영정은 안면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후대에 그려진 것으로 흉배와 바닥의 채전을 그린 형식을 제외하고는 조선중기의 회화적 양식을 찾아 보기는 어려우나, 안면부분은 조선중기의 안면묘사법을 잘 전해 주는상으로 다른 이모본의 원본이 될 수 있다는 점에 가치가 있다.

    박정의 녹색 관복상(가로 169㎝, 세로 90㎝)
    이 상은 조사모(鳥沙帽)에 백한의 흉배가 있는 짙은 녹색의 구름문단령에 서대를 한 인물이 발은 "八"자로 가지런히 족좌대에 올려놓고 표피를 깐 의자에 앉은 모습을 묘사하였다. 이와 같은 낮은 사모는 조선중기의 사모양식을 반영하며 백한의 흉배는 정3품의 품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선중기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표피를 깐 의자와 단령사이로 보이는 첩리, 원근법에 의해 그려진 족좌대, 공수한 옷소매 사이로 흰 옷이 보이지 않는 점들은 조선 후기의 초상화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물의 묘사법을 보면 안면은 엷은 갈색으로 윤곽을 그린 뒤 오악(五岳) 부분을 선염하고 눈썹, 머리카락 등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등 조선 중기의 양식을 보이나 거의 정면으로 보이는 신체, 원근법에 의한 족좌대의 표현등은 조선후기의 초상화 양식을 보여준다. 이 영정의 안면부분은 조선중기의 작품을 本으로 한 듯 조선중기의 안면 표현방식을 반영하나 단령과 표피, 족좌대는 조선후기 초상화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볼 수 있으며 그 묘사수법도 우수하여 조선후기 초상화 연구에 가치 있는 작품이다.

  • 정문부 장군묘
    정문부 장군묘

    경기도 기념물 제37호(1977.10.13) 용현동 379-32,379-28

    정문부 장군은 문신이면서도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다.
    그는 선조때(1588년)문과 갑과에 급제하여 북평사가 되었다. 임진왜란때 국경인등이 적에 항복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의병대장이 되어 반란을 평정하였다.
    1597년에는 길주목사가 되었다. 1624년 이괄의 난에 관계했다는 누명을 쓰고 고문을 당하다가 끝내 죽었으니 그때 나이 60세였다. 그 뒤 좌찬성이란 높은 벼슬을 추증받았다.
    묘 앞 동남쪽 20미터 지점에 그의 신도비가 있는데 1665년 처음 세운 것을 1861년에 다시 새겨 세웠다. 신도비에는 장군께서 임진왜란때 의병을 이끌고 왜적을 무찌른 이야기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 찾아가는 길
    송산동사무소에서 용현초등학교를 지나기 전에 좌측으로 지방노동사무소까지 직진한 후 뒤편에 있다.(버스 1-5번 이용)

  • 노강서원
    노강서원

    경기도 기념물 제41호(1977.10.13) 장암동 산 146-1번지

    노강서원은 조선조 숙종때의 문신 문열공 박태보를 모신 사당이다.
    박태보는 1654년에 서계 박세당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24세 때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1680년 홍문관 교리를 거쳐 이조좌랑, 암행어사, 파주목사 등을 지냈다. 1689년 인현왕후 민씨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전라도 진도로 귀양살이를 가던 도중 노량진에서 장독(매맞은 독)으로 죽으니 그때 나이 36세였다.

    박태보는 학문과 문장에 능통하고 글씨도 뛰어나게 잘 썼다. 그가 죽은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노강서원은 원래 노량진에 있었고, 1695년에 건립되었다. 1925년 큰 홍수로 한강물이 넘쳐 흐르는 바람에 노강서원이 물에 떠내려 갔다. 1969년에 그의 후손들에 의하여 이 곳에 새로 노강서원을 건립하고 1977년에 경기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받았다.

    ++ 찾아가는 길
    지하철 7호선(장암역)에서 수락산 석림사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궤산정, 청풍정터를 지나 좌측에 있음.

  • 송산사지
    송산사지

    경기도 기념물 제42호(1977.10.13) 민락동 285, 286번지

    고려 말 충신인 조견, 원선, 이중인, 김주, 김양남, 유천등 6인의 위패를 모신 곳이 송산사이다. 지금으로부터 6백년 전에 고려가 망하고, 이씨 조선이 개국되자 조견, 정구, 원선, 세 분은 "충신은 두나라의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충절을 내세워 이태조의 끈질긴 권고를 끝내 물리치고, 이곳 송산동 삼귀마을에 들어와 숨어 살았다.
    조견의 호가 "송산"이기 때문에 송산동은 그의 호를 따서 지어진 이름이며, 조견, 정구, 원선 세 분이 돌아왔다 하여 "삼귀마을"이 됐다. 정조때(1798년) 전국의 유학자들이 모여 사당을 세우니 당시의 송산사지 이름은 "삼귀서사"였다. 1840년 삼귀서사를 "송산사"로 고치고 조견, 원선 두 분만을 모셔 오다가 1811년에 이중인, 김주, 김양남, 유천등 고려 말의 충신 네분의 위패를 더 추가로 모시기 시작했다. 1964년 후손들에 의하여 위패석, 제단석, 병풍석을 만들어 여섯 분을 모시니 지금의 "송산사"라고 부르고 있다. 1977년부터 경기도 지방문화재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 찾아가는 길
    용현초등학교를 지나 직진으로 송양초등학교로 가다가 의정부영농종합센터가 보이면 우측으로 가면 있음. (버스 1-5번 이용)

  • 신숙주 선생묘
    신숙주 선생묘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2호(1985.6.28) 호원동 산 91번지 망월사 부근

    의정부시 고산동 구성말에는 신숙주의 묘가 있다. 무송군부인 윤씨의 묘와 나란히 쌍분을 이루고 있으며, 묘전에는 묘비석, 상석, 문인상, 신도비, 한글창제사적비등 각종 석물들이 있는데, 그 중 한글창제사적비는 최근에 건립한 것이다.
    신숙주는 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정치가로서 자는 범웅, 호는 보한재, 희현당이고 공조참판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종때부터 성종에 이르기까지 여섯 임금을 충성으로 보필하였고, 특히 계유정란 이후부터는 조정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저서로는 성종의 특명으로 간행된 보한재집 17권을 비롯하여, 세조 6년(1460) 여진정벌을 마치고 북정에 관한 것을 편찬한 북정록 6권, 세종 25년(1443)일본 서장관으로 갔을 때의 견문록인 해동제국기 1권과 그밖에 동국정운, 사성통고, 오례의, 경국대전 등이 있다.

    ++찾아가는 길
    의정부역에서 퇴계로로 송산교차로를 지나 청학리 방향으로 43번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우측에 의정부교도소가 나오는데, 여기서 맞은편 길로 들어서서 고산초등학교를 지나 구성말마을로 가다보면 좌측에 있음. (버스 1-5번 이용)

  • 망월사 천봉당태흘탑
    망월사 천봉당태흘탑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6호(1985.9.20) 호원동 산 91번지

    조선시대 천봉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탑이다. 천봉스님은 황해도 서흥 태생으로 김두필의 아들이니 이름은 태흘이요, 자는 무등이다.
    16세에 유덕사에서 삭발하고 도원사에게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20세에 음월 우점사한테 수업 정진하더니 백천 호국사에서 득도하였다. 1793년 호국사에서 84세로 입적한니 정골사리 2과와 사리 64매를 백천 호국사, 문화 월정사, 양주 망월사 등에 탑을 세워 분장하였다.

    현재의 망월사 범종각 아래편에 있는데, 탑의 뒤편에는 가파른 암벽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다. 암벽면에 탑건립 당시 시주자의명단이 음각돼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위치가 원 위치임이 틀림없다. 전체적으로 보아 팔각석종형의 부도로서 기단부위에 탑신을 안치하고 옥개석을 얹은 위에 상륜부를 구성하고 있다. 탑신석은 팔각석 종형으로 조성되었으며, 표면에 '서산오세손 천봉당태흘탑숭정기원후 삼갑인 모춘하완립'(西山五世孫 天峰堂泰屹塔崇禎紀元後 三甲寅 暮春下浣立)이라 음각하였다.

    ++찾아가는 길
    지하철 1호선(망월사역) 하차, 등산로를 따라 망월사 방향으로 가면 절 안에 있음.

  • 망월사 천봉선사탑비
    망월사 천봉선사탑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7호(1985.9.20) 호원동 산 91번지

    망월사 천봉당태흘탑 왼쪽으로 탑비가 있는데 천봉스님이 입적한지 4년후, 탑을 세운 지 3년 후에 건립된 것이다.
    무늬가 없는 4각대석 위에 탑비를 세웠으며, 그 위에 한식기와 팔작지붕을 조각한 옥개석을 두었다

  • 서계박세당 사랑채
    서계박세당 사랑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3호(2000. 4.17) 장암동 197번지

    이 가옥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1629∼1703)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기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집필을 하였던 곳이다.
    서계(西溪)선생은 1629년(인조 7년)에 이조참판을 역임한 박정(朴炡)과 양주 윤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31세인 1660년(현종 1)에 증광문과에 장원을 시작으로 예조좌랑, 정언, 병조정랑, 지평, 홍문관교리겸 경연 시독관, 함경북도병마평사 등 내외 관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당쟁에 혐오를 느껴 40세에 관료생활을 포기하고 지금의 의정부시 장암동(당시는 양주 석천동)에 칩거하면서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며 학문연구와 저술, 그리고 제자 양성에 매진하게 된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농사에 관하여 쓴 「색경(穡經)」이 있는데 이 책은 선생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체험한 것을 글로서 남긴 책으로서 귀중한 사료로 인정된다. 또한 고전연구에 관한 저술로서 「사변록(思辯錄)」등이 있다.

    현재의 서계선생 사랑채는 당시 선생이 기거하며 저술활동을 하였던 곳으로 원래는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그리고 행랑채로 이루어진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배치로서 집 앞 어귀에 있는 고목인 은행나무와 그 옆의 계류를 따라 세워진 정자, 학당터 및 그 뒤의 영당과 묘택 등의 일곽이 조선후기 사대부 건축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뿐 아니라 교육적, 문화적 가치 또W한 매우 높다.

    그러나 아쉽게도 6.25전란 당시 대부분 소실되고 지금은 바깥 사랑채만이원형을 유지하여 남아 있고 나머지 건물은 부분적으로 현대식의 건물이 세워져 후손들이 살림을 하고 있어 전체적인 가옥의 구조를 파악할 수 없다. 한편, 99년 8월에 경기도 전통종가로 지정됐고, 2000. 4.17일에 사랑채가 도문화재자료 제93호로 지정됐다.

    ++찾아가는 길
    지하철 7호선(장암역)에서 수락산 석림사 계곡을 가기 전에 좌측에 있음

  • 의정부2동 성당
    의정부2동 성당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9호(2001. 1. 22) 의정부동 429-6번지

    이 성당은 1953년 이계광(요한) 신부가 당시 의정부에 주둔하고 있던 미1군단의 군종 신부인 로제스키 신부의 협조를 받아 미1군단 가톨릭 신자의 헌금을 건립비로 지원받아 1953년 8월 29일 성전건립이 완공되었다. 본 성당은 석조로 구축되었으며, 조적조 외벽의 경우 대부분 적벽돌이 사용되었으나, 6.25전후하여 화강석을 사용한 예가 있다. 이 성당의 경우 공사비 견적 결과 적벽돌보다 석재가 더 저렴한 것으로 판정되어 석재를 사용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본 성당은 회천면 덕정리 돌산에서 채석하여 의정부지역에서 활동하던 석공들에 의해 건축되었다.
    평면은 삼랑식 바실리카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내부의 열주가 약화되어 전체공간이 긴 장방형 형태로 단순화되었다. 천장은 배럴볼트형태로 리브 등의 수직 분절 요소가 없다. 외관은 정면중앙탑형으로 당시 성당건축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다. 외벽의 각 베이와 종탑에는 버팀벽이 지지하고 있으나 약화된 형태로서 원래의 구조적인 역할보다는 양식적 잔형으로 보인다.
    창호와 내부 바닥 등 일부 변형된 곳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50년대를 전후한 시기의 성당건축은 내부의 열주가 사라지고 수직 수평의 분절이 약화되어 일제시대보다 훨씬 단순하고 일률적인 경향을 갖지만 외관 특히 종탑과 정면의 양식적 형태와 상세는 고수된다. 이러한 유형을 양식변형 양옥성당이라고 하며, 특히 전쟁을 거치면서 교회에 대한 천주의 보호, 즉 견고함이 새삼 강조되어 석재를 사용하여 성채와 같이 표현되기도 하였다.
    의정부2동 성당은 6.25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성당건축 변화와 시대적 상황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평면 및 구조, 의장 등에서 건축사적 가치가 높고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찾아가는 길 지하철 1호선(의정부역)에서 서편광장(의정부시청 방향)으로 의정부2동 사무소 옆에 있음

  • 서계 박세당 묘역
    서계 박세당 묘역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3호(2002. 9.16) 장암동 산 146-1

    서계 박세당(1629년(인조 7)~1703(숙종 29))은 조선 후기 중농주의 실학자로서 그 역사적 업적이 뛰어나다.
    참판 炡의 아들로 1660년(현종 1)에 증광문과에 장원, 1664년 부수찬(副修撰)으로 황해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1667년 수찬에 이어 이조좌랑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장형(杖形)을 받았다. 그 해 동실사서장관(冬室使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예조참의 등을 지낸 뒤, 1694년 갑술옥사에 소론이 득세하자 승지로 특진하였다. 이어서 공조판서를 거쳐 이조ㆍ형조의 판서를 지냈다. 1703년 중추부판사로 기노소(耆老所)에 들어가 《사변록(思辨錄)》을 저술, 주자학을 비판하고 독자적 견해를 발표하였다. 이에 반주자(反朱子)로서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낙인이 찍혀 삭직, 유배 도중 옥과(玉果)에서 죽었다. 사직 이인엽(司直 李寅燁)의 상소로 신원되었다. 이중환(李重煥), 안정복(安鼎福) 등 보다 앞선 시대의 실학파 학자로서, 농촌생활에 토대를 둔 박물학(博物學)의 학풍을 이룩하였으며, 글씨도 잘 썼다. 저서로 《사변록(思辨錄)》, 《색경(穡經)》, 《서계집》 등이 있다.
    서계 박세당의 묘는 장암동 소재 석천동 구거 북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분은 단분으로 두 부인과의 삼위합장묘(三位合葬墓)이다. 호석을 이용한 대형의 방형 봉토분이 특징적이며, 묘표 및 신도비는 최근에 조성한 것이다.

  • 회룡사5층석탑
    회룡사5층석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6호(2003.4.21) 의정부시 향토유적 제1호(1986. 3. 14) 호원동 411번지

    신라 선덕여왕 6년(1632) 이곳 회룡사를 창건한 의상대사의 사리를 봉안했다는 전설을 지닌 탑이다. 6. 25때 심한 파손을 입어 옥개는 거의 완전한 것이 없고, 원래의 옥신과 상륜부 또한 없어졌다. 현재의 모습은 1979년 깨어지고 없어진 것을 새로 복원한 것으로 2, 3, 4층의 탑신과 1, 3, 5층의 옥개는 새로 영조한 것이며, 다른층의 것들도 일부 보수되었다. 1매의 지대석 위에 괴임대를 높직하게 하고 기단을 받쳤는데, 이 괴임대는 5구의 안상이 5칸 내에 음각되었다. 그 위에 부도에서 흔히 보는 상 . 중. 하대로 이루어진 기단부가 있는데 하대는 1면을 4칸으로 나뉘어 각 칸에 안상을 1구씩 음각했다.
    상면은 복련으로 덮었으며, 중석은 각 면을 3칸으로 구획했다. 옥신은 모두 각 면을 3칸으로 구획하여 조각했다. 탑의 석재는 화강암이고 높이는 3.3m이다.
    회룡사5층석탑은 조선초기의 왕실조성석탑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석탑의 하나로서, 특히 서울 근교에서 조성된 석탑양식을 대표하고 있다. 확실한 조선초기 석탑은 현재 회룡사 5층석탑, 수종사 5층석탑, 묘적사 5층석탑, 묘향산보현사 8각13층석탑, 신륵사 7층석탑, 낙산사 7층석탑, 청원사 7층석탑, 원각사 10층석탑등 10여점을 헤아릴 수 있는데 대개 세조 때나 그 전후에 조선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석탑은 의의는 세조때 조성된 왕실발원의 석탑들과 거의 동일한 형식과 양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사료에서 보이다시피 무학왕사가 창건했고 태조 어가의 회가를 기념해서 중창된 회룡사에 건립된 석탑이므로 왕실발원으로 평가되며, 왕실발원석탑들과 동일한 양식을 보여주는 이 회룡사석탑은 1450년 전후에 조성된 조선초기 석탑의 대표적인 예로서 조선시대 석탑 편년에 절대적인 기준작품으로 중요한 의의가 있는 조선초기의 뛰어난 석탑으로 평가된다.

  • 회룡사 석조
    회룡사 석조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7호(2003.4.21) 호원동 411번지

    회룡사의 누각아래에는 거대한 석조가 있다. 돌로 만든 수조를 석조라 부르는데 물을 저장하여 사용하는 석조는 예로부터 사찰의 필수품이다.
    총길이가 244cm이고 폭이 153cm, 깊이가 67cm, 돌의 두께가 21cm나 되는 이 거대한 장방형석조는 서울근교에서는 가장 큰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잘 치석(治石)하여 표면이 매끈하게 처리되었고, 바닥으로 내려가면서 완만하게 내곡(內曲)을 이루어 시각적으로도 안정되게 보이고 있다. 물이 흘러내리는 주구(注口)도 끝을 부드럽게 처리하였고 물이 흘러내리는 홈도 매끈하게 만들어 석조의 분위기를 잘 살려내고 있다.
    이런 석조는 서산 보원사지 석조에 버금갈 만한 것이며 관악산 삼막사 석조보다는 다소 큰 것으로 서울 인근 석조로서는 보기 드문 석조라 할 수 있고 만든 솜씨도 뛰어나 석조 연구에 중요한 작품으로 판단된다.

  • 회룡사 신중도
    회룡사 신중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8호(2003.4.21) 11번지

    회룡사의 신중도는 가로219.5cm, 세로 176cm나 되는 꽤 큰 화면의 그림이다. 앞 줄 중앙에 위태천, 뒷 줄 좌우에 제석,범천이 배치되고 있고, 그 주위로 제석,범천의 권속과 팔부중이 배치된 꽉 찬 화면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형태는 늘씬하면서도 경직된 면이 보이는 신체와 19세기 말에 유행하던 특유의 얼굴을 나타내고 있다. 신중들의 옷은 분홍색에 가까운 옅은 붉은 색이 주조색을 이루고 있는데 군청과 녹색들의 약간씩 가미된 19세기 후반기 채색을 칠해 당대 신중탱화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특히 서울 근교의 불화양식이 잘 표현되어 있는 이 신중도는 서울 동작 지장사 신중도와 친연성이 짙은 것으로 당대의 신중도 가운데 대표적인 예로 평가될 수 있다.
    이 신중도를 그린 화사(畵師)는 출막(出莫)과 응석(應碩)이고 편수(片手)로 작품등이 참여했고, 시주는 상궁(尙宮) 신극락화(申極樂華)인데 고종 20년인 1883년 11월 16일에 수락산 흥국사에서 조성되어 이곳에 봉안한 그림이다.